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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러시아 미술에서 회화와 공예 그리고 구성주의와 사회주의 리얼리즘
    미술사 2024. 3. 11. 12:07

     

    러시아 미술의 형성 배경

    유럽과는 다른 독자적인 러시아 미술이 형성된 배경은 비잔틴 제국에서 기독교가 유입되면서부터입니다. 유럽의 국가들과 달리 고대 그리스 로마의 고전 예술과 직접적인 접점과 영향이 없었던 러시아는 이후에 유럽 속의 러시아를 외치며 적극적으로 유럽화 정책을 추진하면서 유럽의 미술과도 공통점을 갖는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하지만, 우선 종교적으로 러시아는 동방 정교였고 또 몽골의 지배로 지리적으로 오랫동안 유럽과는 단절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의 문화 요소에 주변 아시아적인 요소가 더해져 유럽의 사조와는 다르게 러시아 특유의 독창적인 미술을 이루게 됩니다. 러시아의 자연환경이 돌 중심의 유럽 문화와는 달리 나무를 중심으로 한 문화권이라는 점도 작용했습니다. 러시아 미술이 형성된 배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먼저  기독교로 종교가 바뀌어 일원화되면서 비잔틴 제국의 미술도 함께 전해졌습니다. 또 국가를 통일하고 수도 모스크바를 자칭 '새로운 로마'로 부르면서 유럽화 정책을 펴면서 모스크바에 궁전과 돌로 된 교회 건물을 짓기 위해 이탈리아에서 건축가를 초빙했습니다. 이후 표트르 대제의 대개혁 의지로 이제 미술은 더 이상 종교에 종속되어 봉사하는 분야가 아니라 황제라는 절대적 권력을 지닌 궁정 미술이 되었습니다. 자연히 비잔틴 미술의 영향으로 유행했던 종교화는 쇠퇴하고 유럽의 회화 장르 중에서 초상화, 풍경화, 역사화 등이 유행했습니다. 이후 여러 정치적 사회적 혁명으로 인해 러시아 미술은 큰 변혁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러시아 미술의 수준은 향상되었고 특히 그림을 통해 민중 계몽의 수단으로 활용하는 화가들도 혁명을 전후로 등장하면서 화가들의 발전 가능성을 확장했습니다. 

    러시아 미술에서 회화와 공예 그리고 구성주의와 사회주의 리얼리즘
    러시아 미술에서 회화와 공예 그리고 구성주의와 사회주의 리얼리즘

     

    러시아의 종교화와 이콘 회화 그리고 18~19세기 회화

    기독교 개종이 있었던 10세기 말부터 700여년 간 러시아 미술에서는 종교화가 크게 발전하고 유행했습니다. 대표적으로 성서 이야기를 주제로 기독교를 찬미하는 내용의 프레스코화나 이콘 회화, 모자이크가 2차의 평면으로 제작되었습니다. 특히 러시아 회화 중에서 이콘 회화가 유독 발전했던 이유는 토속적인 수호신들도 많았고 환경 측면에서 나무와 숲이 풍부해 나무를 숭배하는 관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콘 회화는 기독교에서 믿음을 굳건히 하기 위해 금을 이용해 제작한 종교화입니다. 러시아의 지역마다 그 특성에 따라 종교화의 특징도 차이가 나는데 북쪽 지방은 엄격한 비잔틴 양식에서 벗어나 독창적이고 자유로운 분위기의 양식이 발달했고, 동쪽 지역은 비잔틴에서 선물로 받은 성모상의 전통을 유지하면서도 민족적 의식을 투영했습니다. 이콘 회화의 전성기는 14세기 이민족의 침입을 받지 않은 노브고로드와 프스코프의 프레스코화로 지역 특유의 아름답고 우아하며 경쾌한 양식을 발전시켰습니다. 그러나 종교화의 황금시대는 15세기였는데 비잔틴 제국 말기에 그리스의 화가를 초청해 회화에 대한 지식과 제작 기술, 그리고 역량을 모스크바 중심으로 활동하던 이콘 회화 화가들에게 전하면서 영향을 주었습니다. 러시아의 종교화는 러시아가 몽골로부터 독립하면서 다시 한번 크게 변화했습니다. 정치적으로 독재 체재가 강화되면서 이콘 회화의 배경과 등장인물은 종교적인 것에서 러시아적인 것으로 바뀌었고, 지방의 많은 이콘 회화 화가가 모스크바로 모이면서 지역적 특색은 서서히 사라졌습니다. 신을 주제로 했던 종교화는 현실의 권력자인 군주를 주제로 하게 되었고 금과 은으로 만든 공예품이 제작되었습니다. 표트르 대제가 추진한 유럽화 정책은 러시아 회화에서 러시아 정교에 기반한 전통적이고 문화적인 요소가 점차 사라지고 근대 유럽 회화처럼 자유로움 세속적인 요소를 등장시켰습니다. 18세기 페테르부르크에 미술 아카데미가 생기고 유럽 특히 프랑스에서 회화를 강의할 교수를 초빙하면서 러시아에서도 초상화가 그려졌습니다. 당시 유행했던 두 장르는 초상화와 장식화였습니다. 18세기에 러시아는 자연스럽게 프랑스 회화로부터 영향받은 그림이 유행했고 19세기가 되어 사회적인 의식이 생기면서부터 그런 영향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회화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역사화는 나폴레옹 전쟁의 승리로 국가에 대한 정체성과 애국심이 생기면서 유행하게 되었고 풍경화나 풍속화도 뒤이어 등장했습니다. 또한 진보적인 사상을 받아들인 화가들은 하층계급을 비롯한 사회의 모습에 눈을 돌리게 되면서 아카데미즘을 떠났고, 이동전파 화가들은 대도시의 특권 계층을 위한 예술이 아니라 민중을 계몽하고 사회를 비판하기 위한 예술 활동을 펼치면서 러시아 리얼리즘을 이룩했습니다. 19세기 말에는 이동전파의 이런 움직임에 반대하는 모더니즘 운동이 발생하면서 러시아 회화는 크게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으로 나뉘어 발전하고 유럽의 근대미술에 버금가는 수준과 역량을 보여주었습니다.

     

    러시아의 공예와 조각

    러시아에서 회화와 함께 발전한 분야는 공예입니다. 동방 정교 시대 때부터 기독교로 개종한 이후까지 종교적인 의식과 행사에서 사용하는 여러 물품과 도구를 직접 국내에서 만들었기 때문에 보석 세공, 도금, 귀금속 제작 등과 관련된 공예 기술이 이미 발달해 있었고 이런 작업에 필요한 재료도 천연자원이 풍부해 구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러시아의 칠보는 세계적으로 뛰어난 품질로 높은 평가를 받았는데 비잔틴 미술뿐만 아니라 멀리 유럽의 이탈리아의 영향도 받은 것입니다. 금이나 은으로 가는 선을 만들어 비튼 다음 음각으로 새긴 부분에 넣은 칠보 작품은 특히 유명합니다. 자연환경 상 나무와 숲의 자원도 풍부한 덕분에 나무로 만들던 민간인들의 생활용품을 금속 공예에 바로 적용하는 방식으로 러시아 고유의 공예 형식이 등장했습니다. 특히 공예의 전성기는 17세기로 가구, 보석 세공, 유리 제품, 염색, 자수 등이 동양의 양식과 바로크 양식의 영향을 받아 빠른 속도로 발달했고 많은 제품이 생산되었습니다. 이때 수도 모스크바의 궁전에  있었던 무기고에서는 러시아와 세계 각지에서 모인 외국 장인들이 황실의 주문품을 생산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장인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유럽의 공예 공방과도 같았습니다. 황실과 더불어 귀족과 성직자들을 위해 공예품을 제작하는 전문적인 공방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흐름을 도자기에도 이어져 유럽에서 장인을 초대해 도자기 제조 기술도 크게 발전했고 황실이 직접 운영하는 도자기 공방도 생겼습니다. 기독교에서는 우상 숭배가 금지되었기 때문에 러시아에 기독교가 유입되었을 때 예술에서 회화, 건축, 공예는 발전했지만 조각은 상대적으로 발달하지 못했습니다. 그 대신 교회 외벽에 성서 이야기 주제와 이교적인 소재가 융합되어 인물 두상과 동물 또는 식물을 깊지 않게 양각으로 장식한 건축물이 등장하는 특징을 이룹니다. 러시아의 조각 작품이 본격적으로 드러난 것은 표트르 대제 시대로, 러시아의 새로운 수도 건설을 구상하며 건축가들을 초빙했을 때 함께 들어온 조각가들이 유럽에서 유행하던 바로크 양식의 조각을 소개하면서 전성기까지 이어집니다. 특히 프랑스 조각가 팔코너가 표트르 대제가 말을 탄 모습을 조각한 작품은 러시아 예술가들에게 자극이 되었습니다. 이들은 이탈리아의 미켈란젤로, 고대 그리스 로마의 조각을 동경했고 이러한 열기는 러시아에도 미술 아카데미가 생기는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아카데미 교육을 통해 양성된 러시아 조각가들은 고전적인 양식뿐만 아니라 인간의 내면을 세밀하게 드러내는 자연주의적인 조각, 인상주의적인 조각 등 다양한 스타일의 작품을 제작했습니다. 

     

    구성주의와 사회주의 리얼리즘

    러시아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형성되기 전에 정치, 사회, 경제, 문화적인 혼란과 변혁을 겪었습니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서유럽의 자본주의 체제를 도입해 산업화와 공업화를 시도했음에도 불구하고 불평등한 사회체제에 대한 민중들의 시위와 이어진 외국과의 전쟁 특히 러일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이러한 혼란의 시기에도 다양한 미술 활동이 이어져서 유럽의 인상주의 작품을 수집한 모로조프는 일반인들에게 공개하기도 하고, 민중과 사회를 위한 예술을 주창했던 이동전파의 후원자 이바노비치 마몬토프는 사설 미술관과 오페라 극장을 건립해 러시아 농민의 미술 작품을 모아 전시하고 화가들이 오페라 극장의 무대 미술에 참여하도록 독려했습니다. 유럽의 여러 사조에 접근하려는 시도도 있어 러시아의 전통 회화를 바탕으로 상징주의의 영향을 받아 유럽의 아르 누보를 받아들이기도 했고, 야수파의 영향으로 원시주의를 지향하는 화가도 있었습니다. '푸른 장미'파로 활동하던 라리오노프와 콘차로바 부부는 독일의 청기사파와 프랑스의 입체주의 화가들을 전시에 초대하기도 했습니다. 러시아에서 비구상 미술은 러시아 입체주의에 이탈리아의 미래파가 더해져 형성되었습니다. 말레비치가 흰 캔버스에 검은색의 기하학적 모양과 십자 모양으로 표현한 우주에 대한 표현은 타틀린이 나무, 철, 종이 같은 일상의 소재로 입체적인 작업을 하는 구성주의와는 대척 관계에 있었습니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맥락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계속되는 혁명과 내전 그리고 외국군의 간섭을 겪으면서 러시아 미술이 혁명을 기념하는 벽화, 정치적인 이념의 포스터, 광장 한 가운데에 설치한 조각을 중심으로 군중들과 무장한 병사에 조명을 비추는 야외극 등을 펼치던 시기와 관련이 있습니다. 당시 러시아는 국가 차원에서 국내의 급진주의적인 교육인들과 유럽에서 귀국한 예술가들과 함께 예술 혁명을 추진했습니다. 한편, 샤갈 같은 화가는 귀국해 미술학교 교장으로서 말레비치를 교수로 초대해 학생들을 교육했으며, 칸딘스키는 조형의 기본 요소인 선, 형태, 색 등을 분석하고 기하학적인 구성을 중심으로 작업했지만 구성주의자들은 이들의 예술이 순수하고 개인적이라는 이유로 배척했습니다. 당시 러시아의 구성주의는 사회의 생산과 예술이 직접적으로 결합하는 방향을 추구했고 프롤레탈리아 운동에도 동조하고 있었습니다. 잘 알려진 타틀린의 '제3인터내셔널 기념탑'은 당시의 첨단 소재이자 기술인 철, 전파, 유리, 영상을 이용한 나선 구조의 대규모 작업으로 러시아 구성주의가 절정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작업이었습니다. 이후 사회주의 노선과 보수적인 경향이 퍼지면서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예술은 쇠퇴하고 예술가들은 유럽 망명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러시아는 국내에서 떠오르는데 혁명과 프롤레탈리아와 관련된 예술가 단체들을 해체하고 대신 '소련예술가 동맹'을 창설해 1930년대 초에는 '소비에트 문화예술의 기본적이며 공인된 방법'으로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인정했습니다. 그러자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예술에 대한 탄압을 심해졌고 현실에 대한 긍정을 영웅적으로 표현하는 작품들이 주목받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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