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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양의 20세기 현대미술
    미술사 2024. 3. 2. 15:05

    서양의 20세기 현대미술의 탄생

    1935년 당시 미국 뉴욕 현대미술관 관장이었던 알프레드 바는 '입체파와 추상미술'이라는 전시를 개최하면서 20세기 현대미술의 계보를 세웠는데, 이것은 반 고흐가 사망한 1890년을 기점으로 그와 폴 세잔, 폴 고갱과 조르주 쇠라로 시작되었습니다. 이 네 명의 화가들은 알프레드 바가 서양의 현대미술의 계보를 세우기 전인 1929년 뉴욕 현대미술관 개관전에 소개했던 화가들이기도 합니다. 이들을 비롯해 그 동시대 화가들의 미술에서 영향을 받아 형성된 20세기 초 미술은 이전의 미술을 비판하고 새로운 것을 개척한다는 의미에서 '아방가르드'로, 그리고 현대미술의 '고전'이라는 의미에서 '고전적 현대미술'이라고 불렸습니다. 이들은 공통으로 눈으로 본 대상의 겉모습을 기계적으로 재현하는 것에서 벗어나는 시도를 했고, 원근법을 무시하면서 사실적으로 그린 이미지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함으로써 르네상스 이후 4세기 동안 대상을 2차원적인 화면에 3차원적 환영으로 표현하고 이미지를 통해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던 회화의 개념을 변화시켰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독일의 미술사학자 베르너 호프만은 위에서 언급한 네 명의 화가를 '20세기 현대미술의 선구자'로 칭했습니다. 폴 세잔은 눈으로 본 대상을 화면 속에 형태와 색채를 구성하는 요소로 바꾸었고, 폴 고갱은 눈으로 본 세계와 상상의 세계를 결합했으며, 조르주 쇠라는 눈으로 본 색채를 과학적인 법칙으로 분할했습니다. 또 반 고흐는 눈으로 본 대상을 마음의 눈으로 해석해 표현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유럽 밖의 미술의 형식이 유럽으로 유입되었고 화가들은 형상적 미술의 경우에도 실물의 형태와 색채를 그대로 따르지 않으면서 형태와 색채가 그 자체의 의미와 기능 즉 자율성을 얻게 되었습니다.

     

    서양의 첫 현대미술

    이런 특징을 가진 20세기의 첫 현대미술 또는 아방가르드 미술은 독일 표현주의인 다리파와 청기사파 그리고 프랑스의 야수파입니다.  독일 드레스덴에서 건축학을 공부하던 키르히너와 그의 동료들은 기성세대의 업적과 세계관을 비판하면서 '다리'라는 그룹을 결성했습니다. 한편 청기사파는 뮌헨에서 두 차례 전시를 개최한 칸딘스키와 그의 동료들을 지칭합니다. 다리파가 결성되던 해에 파리의 '살롱 도톤느' 전시에서는 대상의 형태를 강렬할 색채로 단순화시킨 마티스, 드랭과 같은 화가의 작품이 전시되었는데 한 평론가는 이들의 미술을 '야수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두 미술의 특징인 주관적인 색채 사용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화가는 반 고흐입니다. 야수파 화가들은 조르주 쇠라와 폴 고갱의 영향이 더해져 색의 시각적 효과를 중시한 반면, 다리파 화가들은 반 고흐가 대비가 강하고 왜곡된 형태로 자신의 심리상태를 표현한 것에서 영향을 받았습니다.

     

    20세기 현대미술과 피카소

    피카소를 비롯한 동시대 화가들이 20세기 초에 한 실험적인 활동은 20세기 서양미술이 현대미술로 전환하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는 브라크와 함께 이후 큐비즘으로 불리게 되는 양식적인 실험을 했는데, 폴 세잔이 어떤 대상을 여러 방향에서 본 모습을 한 화면에 그리거나 그 대상의 형태를 기하학적인 형태로 단순화시킨 표현 방식을 아프리카 미술과 결합하면서 화면에서 3차원적 환영을 제거했습니다. 피카소는 브라크와 함께 1912년 캔버스 화면에 물감 외에 종이 같은 오브제를 붙여 콜라주라는 새로운 미술 기법을 만들었습니다. 그는 또 타원형으로 자른 캔버스 가장자리를 줄로 두르기도 했는데 이런 시도는 회화 속의 이미지가 실물 같아 보이지만 환영이라는 사실을 부각해 오브제라고 불리는 미술 장르가 탄생하도록 했습니다. 

    서양의 20세기 현대미술
    서양의 20세기 현대미술

     

    개념미술과 미래주의

    입체파 형식의 회화 작업을 하던 프랑스의 작가 마르셀 뒤샹은 등받이 없는 부엌용 의자에 자전거 바퀴를 달기도 하고, 뒤집어 놓은 변기에 가명으로 'R. Mutt'라고 서명을 해 전시에 출품했습니다. 이런 작업을 '레디메이드 오브제'라고 합니다. 뒤샹은 미술에서 작가가 사물을 직접 만들지 않아도 되고 오히려 작가의 아이디어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주었고 이런 개념미술은 20세기 현대미술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습니다. 20세기 초 미래주의 선언을 발표한 이탈리아의 시인 마리네티는 이탈리아의 문화유산을 무덤에 비유하면서 기술과 공학의 발전을 상징하는 자동차, 소음, 속도 등을 현대적인 현상으로 찬양했습니다. 미래주의는 미술뿐만 아니라 음악, 디자인, 건축, 영화, 연극 등 예술의 전 분야에서 선언서와 함께 진행되었습니다. 현대음악과 플럭서스 운동에 영향을 준 존 케이지는 특히 루이지 루솔로가 20세기 초에 쓴 '미래주의 소음 선언'을 선불교와 함께 자신의 미학적 기원으로 삼았습니다. 또 러시아 화가들은 이탈리아 미래주의와 결합해 입체-미래주의라고 불리는 미술 양식을 만들어 '구축주의'로 이어가기도 했습니다.

     

    '다다'와 초현실주의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여러 나라의 미술가들과 시인들은 전쟁에 반대하면서 스위스 취리히에 모였고 이들은 1916년 '다다'로 불리는 일종의 총체 예술운동을 시작했습니다. 한스 아르프, 후고 발, 트리스탄 자라 등의 주도한 '다다'는 취리히에서 베를린, 하노버, 쾰른, 파리, 뉴욕, 더 나아가서 도쿄로까지 확대되면서 명실공히 20세기의 첫 국제적인 예술운동이 되었습니다. 도시마다 특징은 달랐는데 독일 베를린은 군국주의를 비판했고, 쾰른의 경우 쿠르트 슈비스터의 평면과 입체 콜라주 작품은 이후 1950년대 로버트 라우센버그의 '네오 다다'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으며, 파리와 뉴욕은 20세기 초현실주의 운동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삶과 미술의 일치를 주장했던 '다다'의 유산은 이후 다양한 미술 운동에서 발견됩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19년 앙드레 브르통을 비롯한 파리의 문학가들을 중심으로 초현실주의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이들은 프로이트의 영향을 받아 이성의 통제에 의해 인간의 성적 충동이 억압되어 무의식 속에 남아 있게 되었다고 보았습니다. 그들은 꿈도 그런 형태의 하나로 '이성적, 사회적 통제에서 벗어난 무의식의 글쓰기'라는 자동주의 기법으로 표현해 해방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는 초현실주의 작가들의 작품에서 성적 욕망에 따른 연상 작용을 사물과 연결하는 원리가 되었습니다. 

     

    20세기 현대미술 중에서 미국과 독일의 미술

    20세기의 현대미술이 미국과 독일에서 어떻게 펼쳐지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독일에서는 1919년 발터 그로피우스가 바이마르에 현대적인 미술교육을 위한 국립학교인 바우하우스를 설립했습니다. 1933년 폐교될 때까지 이 학교에서는 추상미술의 선구자 세 사람이 만나게 되는데 추상회화 작업을 한 칸딘스키는 처음부터 이 학교에서 가르쳤고, 말레비치와 몬드리안은 이 학교 교육의 영향을 받아 추상미술의 정체성을 갖게 되었습니다. 바우하우스의 전통은 전쟁 후 미국 추상표현주의에 영향을 주었고 시카고에도 전해졌습니다. 앞에서  알프레드 바가 세운 20세기 현대미술의 계보에는 형상적인 미술이 제외되어 있는데 그 이유는 당시의 국제 정세와 관련된 미국의 입장 때문이었습니다. 20세기 초에 구소련과 독일에서 관영 미술로 선포한 것은 사회주의적 사실주의이거나 그와 가까운 것이었고, 당시까지만 해도 미국과 유럽에서 역시 이런 관영 미술을 비롯해 대상을 객관적으로 묘사한 신즉물성, 초현실주의, 미국에서 시골의 삶을 긍정적으로 표현한 지방주의 등 형상적 미술이 주류를 이루었지만, 알프레드 바는 자신이 현대미술의 계보를 쓴 1935년의 미술을 두 종류의 추상미술 그러니까 기하학적인 추상과 비기하학적인 추상으로 한정했습니다. 20세기 미국 미술의 향후 방향과 뉴욕 현대미술관의 정체성을 설립하기 위해 추상회화 중심으로 만든 이 계보는 추상미술을 옹호한 형식주의 평론가 클레멘트 그린버그에 의해 강화되었고 그 결과 냉전 시대에 전 세계에 영향을 끼쳐 전후에 추상미술이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는 데에 기여했습니다. 1937년 독일 정부가 조직한 '퇴폐미술' 전시는 전후 상황이 이렇게 전개되는 것을 도왔습니다. 당시 독일 정부는 이 전시를 통해 표현주의, 초현실주의 등 반자연주의적이거나 사회 비판적인 미술을 반사회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미술관에서의 전시를 금지했습니다. 그리고 세계대전을 진행하면서 국민 정서를 규합하기 위해 현대미술을 사회의 반대 세력의 기호로 활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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